‘여성 서사’를 그린 F등급(Female-Rating, 여성 감독이나 각본가, 배우가 참여한 작품을 의미하는데, 2014년 영국에서 열린 제24회 배스 영화제어서 처음 사용됐다) 콘텐츠가 시장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그 중심엔 지난 4일 종영한 JTBC 드라마 <닥터 차정숙>이 있다. 극에서 차정숙(엄정화 분)은 의대생 시절인 젊은 나이에 임신해 두 아이를 낳고 전업주부로 살다 죽을 고비를 넘긴 뒤 “이젠 뻔뻔하게 살겠다”며 20년 만에 레지던트를 시작한다.
차정숙 역을 맡은 엄정화는 “젊은 친구가 잘못하면 실수지만 나이 먹은 사람의 잘못은 무능”이라는 쓴소리를 듣는 경력 단절의 설움과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레지던트 생활 중 진로로 아버지 서인호(김병철 분)와 갈등을 겪는 고등학교 3학년 딸 서이랑(이서연 분)의 감정을 보듬는 등 워킹맘의 강인함을 실감 나게 그렸고 드라마는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다.
시청자들은 극에서 차정숙이 “바깥양반은 무슨 일을 하시냐”는 질문에 “남편은 죽었다”고 답하는 장면이나, “너(딸) 좋자고 공부하지, 나 좋자고 공부하냐”고 말하는 장면에서 환호했다. 아내 혹은 엄마들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대변하는 그에게 매료된 것. 그 결과 지난 4월 4.5%로 순조롭게 닻을 띄운 <닥터 차정숙>의 시청률은 마지막 회 방송에 18.5%까지 치솟았다.
콘텐츠 속 여배우의 역할 다양화
<닥터 차정숙>과 같은 여성 서사 드라마가 하루아침에 콘텐츠 시장에 자리 잡은 것은 아니다. 그간 국내 콘텐츠에서 여배우들은 남배우들이 극을 이끌고 가면 힘을 보태는 식의 조력자 역할을 맡았다. 2030대는 로맨스 장르의 주인공 역할이었고, 중년은 극 중 남자 주인공의 엄마 역을 맡거나 불륜을 그린 드라마에 등장하는 등 여배우로서 소화할 수 있는 캐릭터가 한정적이었다.
그러나 자녀들을 서울 의대에 보내려는 엄마들의 경쟁을 그린 JTBC <스카이캐슬>이 선풍적 인기를 끈 후 판도가 바뀌었다. 여성들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들은 흥행하기 어렵다는 편견이 깨졌고 여배우들이 주체적인 여성을 그리며 극의 중심을 이끌고 갈 수 있다는 가능성이 피어난 것.
그 후 재벌가 며느리 우아진(김희선 분)과 우아진 시아버지의 간병인으로 고용된 박복자(김선아 분)를 통해 진정한 품위와 품격에 관해 이야기한 JTBC <품위있는 그녀>를 비롯해 술을 즐기는 여성들의 삶을 녹여낸 TVING <술꾼도시여자들>, 배우 한소희가 남성 전유물로 여겨졌던 현란한 액션을 펼친 넷플릭스 <마이네임>, 가난하지만 우애 있는 세 자매가 사라진 비자금 700억 원의 행방을 찾으며 부유하고 유력한 가문에 맞서는 내용의 TVING <작은 아씨들> 등이 여성 서사 콘텐츠가 K-드라마의 한 장르로서 자리하도록 기반을 쌓았다. 이후 천재적인 두뇌와 자폐스펙트럼을 동시에 가진 변호사 우영우(박은빈 분)의 대형 로펌 생존기를 그린 ENA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가 전 세계적인 성공을 거뒀다.
흥행 공식 된 여성의 이야기
콘텐츠 업계에서는 여성 서사를 다루는 것이 하나의 흥행 공식으로 통하고 있다. 이는 곧 여배우들의 물리적 나이에 대한 선입견이 옅어지고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향상하면서 그들이 작품 속에서 맡을 수 있는 역할이 다양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 주인공의 성장을 비롯해 여성 캐릭터 간 충돌과 갈등, 우정과 연대까지 다양한 면면을 그리며 소재와 장르 역시 다채로워졌다는 의미기도 하다. 이런 현상은 OTT 플랫폼을 시작으로 지상파, 종편으로 번지는 중이다.
넷플릭스에서는 지난해 말부터 올해 상반기까지 신드롬을 일으킨 넷플릭스 <더 글로리>를 비롯해 배우 김희애와 문소리, 서이숙을 필두로 한 <퀸메이커>를 선보였다. <퀸메이커>는 이미지 메이킹의 귀재이자 대기업 전략기획실을 쥐락펴락하던 황도희(김희애 분)가 ‘정의의 코뿔소’로 불리는 인권변호사 오경숙(문소리 분)을 서울시장으로 만들기 위해 선거판에 뛰어들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렸다. 두 배우가 작품을 선택하게 된 배경에는 여성 서사가 큰 몫을 했다. 김희애는 출연 이유로 “주로 남성 배우들이 나오는 장르들이 많아서 남장하고 출연하고 싶다고 얘기를 할 정도로 부러웠다”고 밝히기도 했다.
정치인, 재벌그룹 회장, 선거전략가도 대부분 여배우로 그린 <퀸메이커>는 베테랑 여자 배우들이 다른 성향의 두 여성이 연대해 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을 몰입감 있게 그려 신선하다는 평가를 받았고, 지난 4월 공개된 후 3일 만에 1,587만 시청 시간을 돌파하며 비영어권 TV 시리즈 중 주간 시청 시간 1위를 기록했다.
숨 막히는 일상을 살아가는 유이화(김서형 분)가 은행 VIP 고객들의 돈에 손을 대 파국으로 치닫는 모습을 세밀하게 그린 지니TV <종이달>의 주연을 맡은 김서형 또한 마찬가지다. 그는 여성 서사에 갈증을 느끼던 중 <종이달>이 국내에서 리메이크된다는 소식을 듣고 러브콜을 먼저 보냈다며 “캐릭터가 주체적인 모습을 자유롭게 펼치는 과정에 매료됐다”고 말했다.
사회 편견 깨는 주체적 여성 필요
여성 서사의 확대는 반가운 일이지만 한계점도 존재한다. 여성이 주인공으로 등장해 남성 중심 서사를 그대로 답습한다거나, 모성애를 동력으로 여성 캐릭터들을 평이하게 그리는 것이 그것. <퀸메이커>는 여성 중심 서사로 호평받았지만 남성 배우 중심의 정치 드라마의 클리셰를 그대로 따랐다는 평가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또 배우 전도연이 전설적인 킬러로 등장해 화려한 액션을 보여준 넷플릭스 <길복순>은 본질적으로 모성애를 말하고 있다는 점에서 캐릭터를 새롭게 활용하지 못했다는 평을 받았다.
단순히 여배우들이 주인공으로 나서는 것 이상으로 여성들의 다양한 삶과 가치관, 고민과 성장을 다룰 필요가 있다는 뜻이다. CNN은 지난 1월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 대한 한 기사에서 “한국 드라마에서는 권력을 가진 자들에게 맞서거나 여성의 모습에 대한 기존의 기대를 뒤집는 등 여성이 세상을 움직이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고 평했다. 사회적 편견을 깨뜨리며 주체적으로 자신의 길을 개척해 나가는 모습에 중점을 맞춘 콘텐츠들이 증가해야 함을 보여준다.
한편 <닥터 차정숙>은 ENA 드라마 <행복배틀>로 바통을 넘겼다. <행복배틀>은 SNS에서 치열하게 행복을 겨루던 엄마 중 한 명이 의문투성이인 채 사망하고 비밀을 감추려는 이와 밝히려는 이의 싸움을 그린다. 이엘, 진서연, 차예련, 박효주, 우정원 다섯 배우를 중심으로 극이 펼쳐진다. 또 배우 고현정이 외모 콤플렉스를 가진 평범한 직장인 김모미 역을 맡은 넷플릭스 <마스크걸>과 이영애가 여성 지휘자 차세음으로 분하는 tvN <마에스트라>가 공개될 예정이다.
[맥앤지나=김지은 기자 magajina11@gmail.com]